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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향 특별기획] '정수일의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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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특별기획] '정수일의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경향 특별기획] '정수일의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경향신문 기고문 09.2.5]
 
한민족 뿌리 뻗은 그 길, 말발굽 소리를 따라 달리다

문명을 소통시키는 길, 실크로드에는 동서를 잇는 오아시스로와 초원로, 그리고 해로, 이렇게 세 갈래의 큰 길이 있다. 이태 전 <실크로드 문명기행-오아시스로 편>을 엮어내면서 독자들과 이어 초원로와 해로에 관한 기행문을 펴내기로 약속한 바 있다. 그후 언제쯤 펴내는가라는 재촉 어린 질문을 간간이 받곤 했다. 때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오늘부터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로 독자들과 다시 만나 미루어오던 실크로드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무척 반갑다.
 
‘황금의 산’이란 의미를 지닌 알타이. 눈 덮인 알타이 산 아래로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다. 이 초원이 인류에게 기여한 가장 보람된 일은 동서문명의 맥을 이어주고 소통시킨 것이다.
 
 
그동안 험준한 대흥안령(다싱안링)과 드넓은 몽골초원, 설한풍이 휘몰아치는 시베리아 설원을 몇 차례 누비면서 초원의 신비와 그 속을 올올이 지나간 길, 초원의 실크로드를 현장에서 꼼꼼히 챙겨봤다. 여태껏 북방의 초원 유목세계는 사람들의 눈 밖에 나 있었다. 그 누구도 이들 세계를 세계적 문명권 내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근 5000년 전에 신석기시대를 갓 벗어난 에게해 지역의 애송이 문화를 ‘에게문명’으로 정의하면서, 그보다도 무려 3000년 후에 완숙한 금속문화를 가꾼 북방 유목기마민족들의 문화는 문명과 무관한 ‘미개’와 ‘야만’으로, 그리고 ‘중심문명’에서 저만치 멀리 떨어진 이른바 ‘주변문화’로 비하하고 홀대해 왔다. 작금 미미한 자성의 목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아직은 어이없다.

한편, 우리 겨레의 역사적 뿌리를 이 북방 초원세계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저간의 중론으로서 적잖은 설파가 시도되었다. 개중에는 그럴싸한 설도 있지만, 거개는 애매모호해 신빙성이 별로 없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우리 속에는 여러 방면에 걸쳐 그곳에 뿌리를 두었다고 할 만한 상관성 유물과 증빙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그 뿌리가 어떻게 이 땅으로 뻗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그 뿌리를 뻗게 한 길, 즉 초원 실크로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 길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이러저러한 숙제를 내심 품고 떠난 탐방의 발길은 결코 가볍질 않았다. 사실 이 숙제는 어제오늘에 맞닥뜨린 것이 아니다. 필자가 처음으로 이 길을 밟은 것은 꼭 반세기 전이다. 1958년 8월 카이로대학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처음으로 이 길을 타게 된다. 책 짐이 과중해 비행기를 탈 수가 없어 프라하(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수도)에서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경유,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따라 중국 동북 만저우리를 거쳐 13일 만에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 이후에도 베이징에서 울란바토르를 거쳐 이르쿠츠크로 이어지는 다른 한 초원길을 몇 번 오간 적이 있다. 여행이란 추억의 진행형이다. 그 시절의 추억으로 오늘의 여행은 더더욱 보람차다.

우리가 뜻을 두고 찾아 떠난 길은 실크로드의 초원로다. 약칭 ‘초원로’라고도 하지만, 좀더 정감 나게는 ‘초원 실크로드’라고도 한다. 초원에서 문명을 실어 나른 길(실크로드)이란 뜻에서다. 초원이란 풀이 난 벌판, 즉 풀밭이다. 듣기에 따라 목가적인 환상과 동경을 자아내는 이름이기는 하지만, 곳곳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 양상만도 천차만별이다. 초원은 온대지방의 반건조기후로 말미암아 질척질척한 산림지대와 메마른 사막지대 사이에 생겨난 지대로서 북위 50도에서 40도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지구의 채색정성(定性)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동은 중국 동북지방의 대흥안령 산맥에서 시작해 몽골 초원과 카자흐 초원을 지나서 동유럽에 이르기까지의 폭 수백킬로미터에 푸른 띠의 초원지대가 표시되어 있다. 이러한 지질대의 기본징표는 기온과 강수량이다. 초원지대는 위도상으로 보면 온대지대에 속하나, 북쪽의 침엽수림대와 남쪽의 사막지대 기후의 영향을 받아 한파와 열풍이 오락가락한다. 강수량은 연평균 250~500㎜ 선상에 있음으로 어지간히 건조한 편이다. 물론, 이러한 초원지대는 북방 유라시아 말고도 라틴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지구의 남반부, 심지어 고산지대인 티베트에도 있기는 하지만, 지역적으로 흩어져 있어 연결성이 결여돼 있을 뿐만 아니라, 북방 유라시아 초원처럼 인류 문명사에 남겨 놓은 족적이 확연치 않다. 그래서 아직은 관심 밖에 있다.

초원은 어디까지나 태생적인 자연이다. 그것도 원래는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겨나고 내버려진 자연이다. 그러다가 아득한 그 옛날, 이러한 자연이 인간과 인연을 맺어 그 속에 인간사회를 잉태하면서부터 그 면모와 가치는 일변한다. 이러한 ‘일변’을 가져오게 한 주역은 초원의 유목민이다. 초원은 기온이나 강수량으로 보아 나무나 곡식이 자라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건조기에는 불모지나 다름없다가도 약간의 비라도 오면 풀이 자란다. 그래서 논경은 불가능하고, 생계의 유일한 수단은 가축을 기르는 축산업이다. 그런데 축산은 목초가 필요하고, 사람이나 가축이 생명을 이어가려면 수원(水源)이 필수다. 게다가 혹독한 계절의 변화는 인간과 가축의 이동을 불가피하게 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수원이나 목초를 따라, 그리고 계절의 변화(특히 겨울과 여름)에 순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동하고 순회한다. 이렇게 가축을 기르면서 풀과 물을 찾아 가재와 함께 주거지나 활동지를 옮기는 일을 유목이라 하며, 그런 사람을 유목민이라고 한다.

겉보기에 초원의 유목생활은 그것이 그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그 형태의 구분법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어떤 종류의 가축을 기르는가에 따라 구분하는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목축과 농경 및 수렵의 겸행 여부에 따르는 형태 구분이다. 즉 목축과 농경 및 수렵을 함께 행하는 유목은 낙후한 ‘변두리유목’에 속하고, 목축만을 전업으로 하는 유목은 발달한 ‘초원유목’으로 간주한다. 세 번째는 지리적 환경에 따라 겨울에는 저지대의 동영지로, 여름에는 고지대의 하영지로 엇바꿔 계절 이동하는 규칙유목과 넓은 초원 지역을 지리적 제약 없이 멋대로 이동하는 불규칙유목의 두 가지 형태가 이에 속한다.

그런데 초원에서의 이러한 원초적 유목생활이 어느 날 기마라는 뜻밖의 이동수단과 결합하면서 초원에는 천지개벽에 버금가는 큰 변화가 돌발한다. 기원전 1000년께 서남아시아 유목민들이 청동제 고삐와 재갈을, 이어 스키타이가 등자를 발명했다. 이 발명으로 사나운 말을 길들이고 안전하게 승마할 수 있게 됐다. 급기야 말을 타고 자유자재로 이동하거나 심지어 유희까지 즐기는 기마풍이 일고, 사상 초유의 기마전술이 고안됐다. 기마에 의한 신속한 이동은 사회경제생활에도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기동력이 약한 돼지나 닭 같은 가축은 수행할 수 없음으로 사양에서 제외되고, 반면에 상대적으로 기동력이 좋은 양이나 소·말의 사양은 장려됨으로써 목축구조를 근본적으로 뒤바꿔 놓았다. 이뿐만 아니라, 기마에 필요한 갑옷이나 마구 및 장식품, 그리고 기마에 적합한 짧은 검 등 기마 무기류도 새롭게 만들어졌다. 이러한 제반 요인은 지금껏 평온한 유목생활을 영위해 오던 유목민으로 하여금 전투적이고 기동력이 강한 기마민족으로 확 바꿔놓았다. 그 결과 역사무대에는 유목기마민족과 그 문화가 등장하고, 그것을 소통시키는 길, 초원의 실크로드가 뚫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어느 날 우연하게 발명된 하찮은 고삐나 재갈이 역사의 대변혁을 일으키는 일을 두고 ‘역사적 사변’이라고 한다. 역사는 이러한 ‘사변’의 연속이다.

초원과 유목 및 기마,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인간, 이 넷은 초원 문명과 초원 실크로드의 신비를 파헤치며 그 가치를 가늠케 하는 기본 요소다. 이러한 요소의 파악에 충실했을 때, 비로소 초원 실크로드가 우리에겐 과연 무엇인가를 제대로 판단할 수가 있다. 우리는 이 길의 답사에서 시종 이러한 명제를 안고 그 해답에 부심했다.

우선, 초원 실크로드는 인류문명을 교류시킨 거룩한 길이다. 초원 실크로드란 범지구적 문명교류 통로인 실크로드 3대 간선의 하나로,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초원지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교류와 소통의 길이다. 기원전 5세기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투스가 명저 <역사>(제4권 13장과 16~36장)에서 처음으로 밝힌 스키타이의 동방무역로는 바로 초원 실크로드의 서단에 해당된다. 그 밖의 기록과 유물에 근거해 그 전 노정을 추적해 보면, 흑해 동북편 남러시아에서 시발해 카스피해 북안과 아랄해 남안, 그리고 넓은 카자흐 초원을 지나 알타이산맥 남록 중가리 분지를 거쳐 몽골 오르혼강 연안(고비사막 북단)에 이른다. 여기서 다시 동남행으로 중국 화북지방과 대흥안령을 넘어 한반도까지 이른다.

이 길은 실크로드 3대 간선 중에서 가장 일찍이 개통되어 뚜렷한 교류유산을 남겨놓은 유구하고 역동적인 길로서 유목기마민족의 활무대다. 닫힘과 막힘이 없이 탁 트인 드넓은 대지에서 기계동력에 앞서 가장 활달한 교통수단이었던 말이 종횡무진 활보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돌궐 건국의 명장 톤유쿡의 비문에는 그가 남긴 이런 명구가 새겨져 있다.

“닫힘과 막힘없는 소통과 교역의 통로… 눈부신 파노라마”

“성을 쌓고 사는 자 기필코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지어다.”

풀이하면, 닫힌 사회는 망하고 열린사회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열림만을 체험한 초원인들의 소박한 예단 같지만, 그 어떤 역사의 명언도 미치지 못한 만고의 진언이요 진리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만큼의 무언가를 이루어놓는다는 뜻이다. 인류를 위해 초원이 이루어놓은 것 중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 그것도 초원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마도 자고로 막혔던 동서남북 문명의 맥을 처음으로 서로 이어주고 소통시킨 일일 것이다.

 
 
우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이르쿠츠크 박물관, 그리고 가까이는 동북 랴오닝성 츠펑(赤峰) 박물관에서 이른바 ‘비너스상’이라고 하는 이색적인 여인 나체상 유물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1882년 이래 서쪽은 프랑스로부터 동쪽은 바이칼호 부근과 적봉에 이르는 20여 군데에서 이런 유물이 수백 점 발견되었다. 그 제작연대는 자그마치 2만여년 전의 후기 구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인류 최초의 교류물은 북방 유라시아를 동서로 관통한 여명기의 초원로를 타고 이렇게 동서의 광활한 지역에 전파되어 태고의 여성상과 사회상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오늘도 학계에서 시원이나 편년을 놓고 갑론을박하는 우리의 청동기 문화도 따지고 보면 초원 실크로드를 통해 이곳까지 전해진 것이다. 서아시아 청동기 문화의 영향을 받아 기원전 2000년께 남시베리아에서 안드로노보 문화가 발생한다. 이 문화를 이어받아 기원전 1200년께에 카자노브 초원에서 발달한 카라수크 청동기 문화가 동시베리아와 몽골 초원을 거쳐 북중국이나 한반도에 그 씨앗을 뿌려놓았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북방 100㎞의 산간오지에는 총 212기의 분묘를 품고 있는 유명한 노인울라 고분군 유지가 있다. 이곳 유지에서 발굴된 유물 가운데는 전형적인 유목 흉노문화와 농경 중국문화 유물이 뒤섞여 있다. 대표적인 ‘호한문화(胡漢文化)’의 혼성장이다. 이렇게 이질적인 두 문화가 몽골 초원의 동단 연산(燕山) 자락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곳까지 뻗어간 초원로 덕분이다. 유사한 경우는 동부 알타이에 자리한 6기의 파지리크 고분군 유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스키타이와 중국, 페르시아, 멀리로는 그리스 문화까지 한데 어울린 흔적이 역력하다.

이쯤에서 우리네 시간여행의 시침을 어제에서 오늘로 한번 돌려보자. 우리는 지금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럽 중앙부의 모스크바까지 달리는 시베리아 초원 횡단철도에 몸을 싣고 있다. 시간대가 7번이나 바뀔 정도로 멀고도 긴 이 철도의 길이는 장장 9288㎞(서울에서 부산까지의 22배)에 달해 세계에서 가장 길다. 1891년부터 1916년까지 25년에 걸쳐 부설한 철도이니만치, 개념으로 말하면 초원의 신실크로드다. 오늘도 이 신실크로드를 통해 어마어마한 양의 물동이 동서로 운반되고 있으며, 숱한 인종이 오가고 있다. 이 길이 없었던들, 시베리아는 동토의 숙면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것이며, 러시아는 우랄의 서편에서 왜소한 몰골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북방 유라시아의 크고 작은 모든 나라들이 시종 이 한 길에 교역과 소통의 운명을 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으로, 초원 실크로드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그 연변과 더불어 찬란한 인류문명을 보듬어 키운 요람이라는 것이다. 문명의 탄생은 교통의 발달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교통의 발달 없이 문명의 향상이나 전파란 상상할 수 없다. 이러한 문명론의 원리가 바로 이 초원 실크로드에서 그대로 실증되고 있다. 이것이 이 길이 인류 모두에게 전하는 메시지이고, ‘우리에겐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또 하나의 냉철한 화답이다. 이러한 메시지와 화답에 대한 바른 이해는 오로지 이 길과 그 연변에서 싹트고 꽃핀 인류 보편문명에 대한 ‘문명우월주의’이나 ‘문명중심주의’의 색안시(色眼視)를 걷어냈을 때만이 가능하다.

우리는 이 길을 오가면서 이점을 사무치게 통감한다. 내로라하는 문명사가 토인비나 안보전략가 허팅턴마저도 그러한 색안시를 벗어나지 못한 채 유목기마민족 문화를 아예 문명권 밖으로 밀어내버렸으니 말이다. 역사란 누가 아니라고 해서 아니 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역사의 복원이 이 길 답사의 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난제이기는 하나 누군가가 꼭 수행해야 할 과제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전시품이나 파지리크 고분군 출토 유물에서 스키타이 문화유산을 접할 때면 깜짝깜짝 전율한다. 때로는 자기 눈을 의심한다. 문자가 없었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무시되고 비하돼 온 그네들이 어떻게 저런 눈부신 문화를 창출할 수 있었을까 하는 놀라움과 개탄에서이다. 기원전 8세기부터 3세기 사이에 남러시아 일원에서 발흥한 스키타이는 동쪽으로 알타이산맥 일대까지 진출해 사상 처음으로 초원로를 따라 동서방 간 무역로를 개척하고, 유목기마문화를 옹골차게 꽃피웠다. 동물의장과 귀금속을 핵심으로 하는 화려한 스키타이 미술은 미술공예사의 선구로, 귀중한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이다. 스키타이에 이어 흉노나 돌궐 같은 유목기마민족들도 일세를 풍미한 제국을 세워 값진 문화유산을 남겨놓았다.

곳곳에서 이들 유목기마민족들이 창조한 황금문화 앞에 서면 오늘에 으쓱대는 우리의 어깨가 갑자기 움츠러진다. 기원전 5세기부터 약 1000년간 황금의 원산지 알타이산맥을 중심으로 동서의 광활한 지역에는 황금문화대가 이루어진다. 자고로 황금문화는 고차원의 문화다. 알마아타 역사박물관에서 만난 ‘황금인간’이나 신라의 금관은 이 황금문화의 백미다. 알타이산맥 서쪽 기슭의 이시크 고분(기원전 5~4세기)에서 출토된 ‘황금인간’은 무려 4000여장의 황금조각으로 지은 옷을 입고 있다. 그래서 지어진 이름이다. 주인공은 역시 스키타이 일족인 사카족 귀인이다.

신라는 황금문화의 동단에서 그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세계 현존 금관 10기 중 7개나 만들어낸 ‘금관의 나라’로 자리매김했었다. 이 황금문화의 전파자는 스키타이와 흉노를 비롯한 유목기마민족들이며, 그 통로는 다름 아닌 알타이산맥에서 동서로 뻗어나간 초원 실크로드다. 모두가 이 길과 그 연변에서 개화한 인류의 정수문명들이다.

최근 대흥안령 초원의 남쪽 자락에서 그간 소곤거리고만 있던 ‘훙산(紅山)문화’가 세인을 놀라게 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이 문화의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츠펑 박물관에 들어서면 해설원은 집터와 옥룡(玉龍, 중심도시 츠펑의 상징물)을 비롯한 몇몇 유물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자랑하면서 이 문화의 편년을 6000년 전으로 잡고 있다. 이를테면, 황하문명을 비롯한 세계 4대 문명에 앞선 문명이라는 것이다. 이어 그 주역은 중국계의 동이족이라고 역설하면서 은연중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과는 구별된다는 의중을 내비치고 있다. 억설이 아니 되기를 기대한다. 이 같은 도전은 어차피 여러 주체 간에 벌어질 ‘역사전쟁’의 예고란 감이 짙게 든다. 아무튼, 초원의 자양분을 머금고 자란 이 문화의 유구성만은 부인할 수 없는 성싶다. 더구나 청동기나 묘제, 바위그림 등 여러 분야에서 우리 문화와의 상관성이 예시되는 이상 우리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초원 실크로드가 한반도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문명일화(文明一花)’일 수도 있다는 믿음마저 든다.

끝으로, 초원 실크로드를 더듬어가면서 우리 겨레의 역사적 뿌리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은 이 길이 우리에게 갖는 특별한 의미일 것이다. 초원 실크로드를 다니다 보면 우리와 너무나 흡사한 현상들을 수두룩하게 발견하게 된다. 이 점에 착안해 사람들은 이 길 위에서 한민족 ‘뿌리 찾기’를 시도해 왔다. 필자도 이번 답사에 앞서 이런 시도를 몇 번 한 바가 있다. 원래 모든 논제는 왈가왈부의 주고받음으로 시비가 가려지는 법이다. 그런데 이 ‘뿌리 찾기’ 난제에서는 아직 연구가 미흡한 탓으로 ‘왈가’는 그런대로 있으나 ‘왈부’는 잠잠하다. 누가 어정쩡한 말을 해도 시비를 걸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사실 이 길을 오가는 필자의 마음을 가장 많이 쓰게 한 대목이 바로 여기다. 어찌 보면 이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 이 길을 다녀왔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초원 실크로드가 ‘우리에겐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응답이 바로 ‘뿌리 찾기’란 얘기다. 어떻게 찾을 것인가? 현장에서 보고 듣고 읽고 해서 얻은 결론은 다원적인 접근방법으로 차근차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은 여러 분야의 연구가 제대로의 구색을 갖추고 있지 못하지만, 이제부터라도 하나하나 보완하면서 천착해야 할 것이다.

우선은 지질학적 접근이다. 최근 러시아 지질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바이칼은 지금도 지진활동을 하고 있는 내륙단층지대로서 빙하기 때는 고립된 오아시스와 같은 열수(熱水) 광산이었다고 한다. 당시 구석기인들은 혹독한 추위 때문에 열수가 치솟는 따뜻한 바이칼에 머물러 있다가 해빙기에 큰 홍수가 일어나자 남하해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생태학적으로 고려(고구려)는 북방어 ‘코리’나 ‘코올리’에서 유리되었으며, 순록 유목민 일파가 대·소흥안령을 넘어 아무르강(흑룡강)이나 송화강을 따라 서남행으로 만주지역을 거쳐 한반도까지 이르렀다는 이른바 ‘순록민족기원설’도 일갈을 고한다.

근간에는 체질인류학적 연구가 많이 진척되어 흥미로운 결과를 쏟아내고 있다. 체질인류학적으로 보면 한민족의 20~30%가 남방계 아시아인이고 70~80%는 북방계 아시아인이다. 그리고 유전학적 DNA 지표에 근거해 동아시아인들의 초기 이주경로를 추적해보면 약 6만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현생인류가 동남아시아나 시베리아 쪽으로 이주해 오늘날의 동아시아인 집단을 형성했다고 한다. 미국 에모리대 연구소의 세계 종족별 DNA 분석자료에 의하면 바이칼 주변의 야쿠트인과 부랴트인, 아메리카의 인디언, 그리고 한국인은 한 계열에 속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야쿠트(현재이름 사하)에 가면 별로 낯설지 않다.

그나마도 그간 가장 많이 시도한 것은 친연성과 상관성에 초점을 맞춘 문화비교학적 접근이다.

초원의 지천에 깔려 있는 오보나 솟대, 굿놀이에서 보다시피 우리를 포함한 북방 시베리아인들의 정신적 뿌리는 샤머니즘이다. 인간이 처해진 자연환경에 대해 예를 표하고 대화를 하는 친환경주의 사상의 결정체가 바로 샤머니즘이다. 자연을 등지고 인간만을 생각하는 인간본위주의나 자연파괴주의에 대한 해학적 경고다. 부랴트의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에서 보다시피 우리는 시베리아 특유의 구비문학에서도 한국문화에 녹아 있는 유사한 구비전승 요소들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한국 전통복식의 원형이 북방 유목민들의 전개형(前開型, 카프탄) 복식이라는 사실은 유목민들의 전통복식 전시회나 현행 복식에서 그대로 확인된다. 논란은 있지만 한국어와 알타이어 간의 상관성은 부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 밖에 뿌리문제는 아니지만, 한 역사시대에 우리 겨레가 이 초원 실크로드와 맺은 이러저러한 인연도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그 역시 우리 역사의 외연이고 증언이기 때문에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발해의 고성 노브로드데예프카에서 발견된 8세기의 소그드 은화는 초원 실크로드의 한 지선이던 ‘초피로(貂皮路)’를 통한 발해와 중앙아시아 간의 교역상을 시사해준다. 구한말부터 시작된 50만 한인들의 거친 시베리아 개척사는 눈물겨운 수난사이지만, 그들에 의해 한국문화가 시베리아에 전도되고, 오늘날 그들의 후손들이 두 지역 간 교류의 가교역할을 하는 것은 우리 역사의 한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들 ‘테마관광’은 한 차원 높은 관광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달성코자 하는 모종의 주제가 설정돼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이러저러한 이야기가 초원 실크로드의 답사 주제를 설정하고 초원문화를 이해하는 데 일조했으면 한다.

초원의 자연은 장려하지만 숙연하기도 하다. 초원의 삶은 역동적이면서도 여유작작하다. 초원의 길은 자유분방하나 올곧고 막힘이 없다. 초원의 이러한 자연과 삶, 길은 인류역사를 아름답게 수놓은 한 폭의 파노라마다. 그 속에서 시간여행을 하다 보면 추억에 흠뻑 젖기도 하고, 새로운 앎에 가슴이 설레기도 한다. 그 추억과 앎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오늘부터 이 지면을 통해 52장의 낱개 장면을 하나씩 펼쳐보이게 될 것이다.

 
정수일
[경향신문  2009 02/05]
[중앙] 정수일 소장 ‘실크로드’강좌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첫 심포지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