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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계일보] [나의 삶 나의 길] ‘문명교류학 대가’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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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나의 삶 나의 길] ‘문명교류학 대가’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2016-10-28

[나의 삶 나의 길] ‘문명교류학 대가’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인류 문명교류 흔적 찾아 전 세계 누벼…

새 선진학문 개척”

 
 
“1960년대 모로코주재 중국대사관의 외교관 근무 시절이었어요. 당시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편지를 써 민족의 통일을 위해 조국(북한)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어요. 그 일로 베이징에 소환됐고, 1년여간 외교부 간부들과 토론을 벌이다 북한으로 가게 되었지요. 공산당 국제주의와 민족주의 중 무엇이 우선인지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었습니다.”

정수일(82)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은 ‘조국통일’을 가슴에 새기고 산다며 이같이 털어놨다. 중국외교부 소속 외교관, 평양외대 교수, 조선노동당 대외연락부 요원, 단국대 교수 등 파란 많은 인생이었다. 

남들 같으면 손자손녀를 무릎에 앉히고 여생을 보낼 나이이지만 정 소장은 아직 왕성한 연구의욕을 보인다. 최근 ‘문명의보고 라틴아메리카를 가다 1,2권(창비)’을 낸 정 소장을 28일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집무실에서 만났다. 50여평 넓이의 집무실은 책들로 빼곡했다. 실크로드 초원로를 답사해 ‘실크로드 문명기행’(2006),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2010) 등 학술 대작만 15권을 낸 그는 또 하나의 대작을 내놓았다.

이번에는 라틴아메리카였다. 라틴아메리카 곳곳을 찾아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인류 문명교류의 흔적을 복기해냈다. 동서 문명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독특한 아이콘을 만들어냈다. 그를 문명교류학의 대가로 꼽는 이유다.


-문명교류학에 눈을 뜨게 된 계기는. 

“55년대 베이징대 동방학부를 졸업(수석으로)한 이후 국비 장학생으로 카이로 대학 동방학부에 유학하면서 역사와 문명에 눈을 떴다. 세계는 왜 이렇게 불평등한가, 젊은 날부터 세계는 일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렇듯 세계 시민사회는 분열되고 모순되는 현상을 보인다.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 문명교류를 통해 모순을 해소하고 나름 해결책을 내려 한다.”  

-고단한 발품을 팔아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했다. 가장 큰 소득을 소개한다면.

“2012년 80일의 일정으로 빡빡했지만 리스본에서 시작해 20개국, 51개 지역을 탐방했다. 유적과 박물관 등 284곳을 돌아보았다. 미진한 생각이 들어 2014년 다시 카리브해 연안을 찾았다. 무릎을 쳤다. 인류의 일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인류는 혈통적인 동종이다. 인류의 조상이 살았다는 아프리카가 그 문명의 요람이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 고고학이 발달했다. 두번째는 역사에는 법칙이 있다. 공통적인 법칙, 즉 통칙이 있다. 서로 깔아뭉개고 지배하는 건 역사가 아니다. 셋째, 통섭의 문화를 보았다. 세계는 통하고 문화는 교류한다. 넷째 가치의 문제인데, 인간에는 보편적인 가치가 있다. 상부상조의 교류가 그것이다. 이를 확인하면서 세계 일체성을 연결해 보려 한다.”

-역사에 법칙이 있다는 것은 사실 아널드 토인비의 주장 아닌가.

“토인비 역시 은연중 문명을 중시하고, 문명발생론과 문명순환론을 제시했다. 1930년대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를 썼다. 30개 문명이 나타나 현재 7개가 남아 있다고 보았다. 통상 4대 문명이 주도했다는 것과는 다르다. 나는 문명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인간이 이성을 발휘해 극복해 발전시켜 나간 게 문명이라고 본다. 아프리카는 환경이 열악함에도 인류의 조상이 존재했고, 남미의 잉카문명의 경우 산 꼭대기에 거대건물이나 유적이 세워져 있지 않는가. 열악한 환경을 이성으로 극복한 게 문명이다.”

-문명론을 다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인류역사가 기록된 기간을 대략 5000년으로 본다. 충돌과 모순, 극복의 과정이었다. 그런 가운데 종교도 나왔다. 가까이는 1차 세계대전을 들 수 있다. 전쟁으로 모순을 해결해 보자는 거였다. 결과는 참담한 대량파괴였다. 방법이 없었다. 서구 몰락론이 등장했다.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를 쓴 계기는 서구문명의 몰락이었다.”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은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유 민주 통일은 우리 민족의 숙명”이라면서 “죽기 전에 내고향이라도 한번 가 볼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남정탁 기자
 
-문명충돌론은 지금도 유효한가, 아니면 폐기된 것인가.

“1990년 소련 붕괴로 진영논리와 냉전이 끝났지만 뜻밖의 여러가지 국제적 문제가 발생했다. 헌팅턴의 문명충돌론 같은 게 나오는 이유다. 냉전 이후 경제적 모순, 정치적 충돌, 민족 감정 등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인류는 아직도 문명충돌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공통분모란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문명교류를 가지고 미래를 설명하려고 한다. 민족주의란 연대의식, 수호정신, 끼리끼리 뭉치는 것이다. 민족이 발전하려면 서로 오가야 한다. 고립되면 발전하지 못한다. 배타적이어선 발전이 없다. 교류가 있어야 한다. 충돌이 아니라 문명교류가 그것이다.”

-실크로드의 지평을 아메리카까지 넓혔다는 평가가 이어진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매년 중국을 여행하는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여행 직전 연구모임을 갖고 사전지식을 쌓는다. 실크로드는 결국 한반도와 연결된다. 앞으로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인류의 발자취를 전 세계로 연결시켜 보려 한다.” 

-문명교류학에 그토록 천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문명교류학만큼은 세계수준으로 아니, 그 이상 끌어올리려는 비전을 품고 나아가려 한다. 소위 선진국 학문이라는 것을 해석하느라 낑낑대면 그들은 저만치 앞서나가 있다. 그러다 보니 인문사회학을 비롯한 학문 전반에 우리 것이라고 해외 석학들 앞에 떳떳하게 내놓을 만한 것이 거의 없다. 우리는 이 점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허풍을 부리거나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라의 발전이나 문명수준을 가늠하는 잣대는 학문이다. 첩경은 우리 손으로 새로운 선진학문을 개척하는 것이다.”

-중국외교관 시절 저우언라이의 가문 아가씨와 혼담도 오갔다는데.

“한때 에피소드일 뿐이다. 58년 무렵 중국 외교부 서아시아·아프리카국에 근무할 때였다. 그러나 조국(북한)에 돌아가야 할 몸으로 할 일이 많다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장성택이 사망한 북한의 앞날을 예측해 본다면.

“평양에서 교수로 있을 때 장성택은 당시 학생이었다. 북을 떠나온 지 30년도 넘었다. 인물이 대부분 교체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한민족이 다같이 잘살자는 것이다. (통일되어) 인구가 8000만명 정도로 불어나면 경제적으로 자립이 가능하다. 공급과 수요 밸런스가 맞게 된다.” 

-어릴 적 연변과 고향 땅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중국 간도 땅에서 나고 자란 나는 여덟살이 되던 해, 그러니까 1942년 겨울방학이었다. 할머니 손에 끌려 처음으로 고향 땅을 밟았다. 아버지가 3대 독자였으니 4대째 장손인 나를 할머니는 어릴 적부터 무척 아껴주셨다. 엄동설한 할머니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굳이 나를 데리고 간 건 이 때문이다. 선영이 있는 곳은 함북 명천군 상고면 포하동이다. 바닷가의 자그마한 어촌이다. 어느날 할머니는 나를 머리보자기를 풀어헤쳐 놓은 곳에 앉혀 놓으시고, 고향 땅을 등지고 낯선 간도로 유랑하게된 구슬픈 사연을 주욱 들려주셨지요.” 

-고향의 의미를 설명한다면. 

“고고지성을 울린 곳이고, 생명의 첫줄인 태를 묻은 땅이요, 걸음마를 익혀준 조련장이다. 인간에게 고향은 삶의 뿌리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 가서도 오매불망 그리는 곳이 바로 고향 아닌가. 내고향 칠보산은 이북 4대 명산 중 하나다. 일곱개 보석산으로 이뤄졌다 해서 이름 붙여졌다. 그야말로 절경이요 제2의 금강산이다. 1100여년 전 지은 개심사도 아늑히 자리 잡고 있지, 꿈 속에서나 가끔 보인다.”

-후학들이나 청년들에게 전할 말을 한마디 해 달라.

“자만과 자족에 빠지면 소인배가 되어 ‘소성’을 ‘대성’으로 착각하고 오만과 해이의 늪에 빠지기 십상이다. 지난 200년간 우리의 암둔으로 인해 자초된 한민족의 침체와 허무의 공백을 메우고 새로운 백년에 비상하려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로지 분발뿐이다.”

-어려웠던 시절 함께했던 부인에 대한 애틋함이 대단하다고 들었다.

“오직 우리 겨레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견뎌냈다. 그런 나를 아무런 싫음 없이 받아준 사람은 아내였다. 뒤에서 내조하는 아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가정보다는 조국에 대한 열정이 앞서는 나를 말없이 받아주는 아내였다.” 

정 소장의 학문과 조국에 대한 열정은 보이지 않는 아내의 손에 의해 완성된다. 간호사 출신인 부인은 한국외대 아랍어과에서 강의하던 88년 만나 결혼했다. 2시간반 동안의 인터뷰를 끝내면서 정 소장은 “남은 생애 동안 통일의 기미라도 볼 수 있을까”라고 탄식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 정수일은…? 
 
△34년 만주 간도 용정 명천촌 출생 △52년 베이징대 동방학부 졸업, 중국 외교부 및 모로코주재 중국대사관 외교관 △63년 평양국제관계대, 평양외대 교수 △74년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 요원 선발 △88년 한국외대, 단국대 교수 △2000년 국가보안법 위반 5년 복역 후 출소 △2003년 5월 한국국적 취득 △2008년 11월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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