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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파로스 등대 자리에 카이트 베이 성채만 남아: [이집트 여행기 18] 알렉산드리아 해안 작성자 이상기
파일 조회수 1290
파로스 등대 자리에 카이트 베이 성채만 남아: [이집트 여행기 18] 알렉산드리아 해안
 
파로스 등대 이야기
 
파로스 등대 지도
ⓒ 이상기

 
점심을 먹은 식당 이름이 아티네오스(Athineos)다. 역사가 113년이나 되는 유명한 레스토랑으로, 정치가와 기업가들이 많이 찾는 국제적인 식당이다. 우리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지중해의 풍광을 구경한다. 식당 바로 앞으로 도로가 지나가고, 그 너머로 해안선이 길게 펼쳐진다. 해안선을 따라 낚시꾼들의 모습도 보인다. 잠시 후 지중해에서 잡은 생선을 튀겨 만든 생선구이가 나온다. 이것을 밥 그리고 샐러드와 함께 먹으니 참 맛있다. 우리 입맛에 잘 맞는다.
 
밥을 먹고 우리는 해안을 따라 나 있는 '7월 26일 도로'를 타고 파로스(Pharos) 등대로 향한다. 파로스 등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인 기원전 280-247년 사이 파로스 섬에 세워졌다. 그 높이가 120-140m에 달해, 기자의 피라미드와 함께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이 등대가 956년부터 1323년 사이 이곳에서 발생한 세 번의 지진으로 크게 훼손되어 버려졌다.
 
그리고 1480년 폐허가 된 등대 위에 카이트 베이 성채가 세워졌고, 등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994년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성채 동쪽 항구 바닥에서 등대의 잔해 일부를 발견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 도시를 건설한 것이 기원전 332년이고 죽은 것이 323년이니, 그로부터 약 50년쯤 후 등대가 생겼다. 등대는 가로 세로 8m의 사각형 기단 위에 2단의 원통형 구조물로 이루어졌고 그 위로 굴뚝이 있어 불이 나오도록 했다. 이러한 등대 구조가 후대 모든 등대의 모범이 되었다.
 
파로스 등대 복원도
ⓒ 이상기

 
파로스 등대에 대해 가장 정확하고 자세하게 기록한 사람은 안달루시아 출신의 아라비아 여행가 이븐 무하마드 엘 발라위(Ibn Mohammed el-Balawi)다. 그는 1165년 알렉산드리아를 방문, 파로스 등대를 보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파로스 등대는 섬의 끝에 솟아 있다. 건물은 한 변이 8.5m인 육면체다. 동남쪽으로 바다가 감싸고 있다. 등대의 둘레로는 높이 6.5m의 벽이 감싸고 있다. 바닥은 등대를 향해 올라가는 형태로 되어 있고, 안으로 183m의 경사로가 나 있다. 이 길은 곡선의 아치 형태로 등대 꼭대기까지 이어진다. 아치는 16개나 된다."
 
파로스 등대는 사라졌지만 그 모습은 알렉산드리아 시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시의 깃발과 문장에 모두 파로스 등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8년부터 이집트 데일리 뉴스(Daily News Egypt)를 중심으로 파로스 등대 재건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쇼핑몰을 설치하는 등 상업적인 의도가 겹쳐져 성사여부는 불투명하다. 더욱이 현재 이집트 정세가 불안해 당분간은 논의 수준에 머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슬람시대의 유산 카이트 베이 성채
 
카이트 베이 성채
ⓒ 이상기

 
해안도로를 따라 가 종점에서 차를 내리니 파로스 등대는 없고 웅장한 카이트 베이 성채(Citadel of Qaitbay)가 나타난다. 카이트 베이 성채는 1477년 맘룩(Mameluke) 왕조의 술탄 카이트 베이에 의해 방어성으로 만들어졌다. 그들은 무슬림이었기 때문에 성안에 모스크도 만들었다. 카이트 베이 성채가 방어성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영국이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한 1882년이다. 이때 성채의 서쪽 부분이 크게 파괴되었다.
 
1904년이 되어서야 국방부가 나서 성의 위층을 복원했다. 그리고 국왕인 파룩(Farouk)이 휴식을 취하는 별궁으로 사용하길 원해서 건물의 신속한 수리를 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1952년 이집트 혁명이 발발하면서 파룩 왕이 물러나게 되었고, 카이트 베이 성채는 해양박물관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1984년 이집트 고대 문화유산국이 이 성채를 대대적으로 복원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카이트 베이 성채
ⓒ 이상기

 
우리는 성채로 들어가기 전 서쪽 광장에서 성채를 조망한다. 그런데 노점상도 많고 관광객도 많아 멋진 풍경을 잡기가 힘들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한적한 성채의 모습을 잡아보려고 바닷가 쪽으로 간다. 그러자 성채의 모습이 훨씬 더 멋지게 잡힌다. 성채 앞바다에 쪽배들이 몇 채 떠 있고, 그게 잔잔한 파도에 일렁인다. 역시 바다에는 배가 있어야 제격이다.
 
이곳의 장사꾼들은 별로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다. 나는 막대에 걸려있는 복어와 상어 박제를 유심히 살펴본다. 그렇다면 지중해에도 복어와 상어가 있다는 얘기다. 나중에 해양박물관을 잠깐 살펴보았는데, 그곳에는 복어 외에도 도미, 놀래기 등 많이 보던 어류가 있었다. 우리는 이제 성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남쪽 정문으로 향한다. 가다 보니 국립 해양수산연구소가 보인다. 그러고 보니 알렉산드리아가 이집트 해양수산의 본거지인 모양이다.
대포에 올라가 노는 아이들
ⓒ 이상기

 
정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중문이 나타난다. 이 문을 지나야 비로소 성채가 눈앞에 나타난다. 성채는 3층으로 되어 있다. 아랍식 성채답게 문이 작고, 성 위에 톱니 모양의 방어벽이 촘촘하게 만들어져 있다. 성채로 향하는 길 좌우에는 기단이 만들어져 있고, 그 위에 대포가 거치되어 있다. 이 대포는 이제 더 이상 기능을 하지 않는지, 애들이 올라가 장난감처럼 논다.
 
성채의 안은 어떻게 생겼을까?
 
성채 안으로 들어가니 1층이 상당히 어둡다. 우리는 바로 2층으로 올라간다. 2층에는 사방으로 작은 창문이 나서 바깥을 내다 볼 수 있다. 작은 창문에는 바깥으로 쇠창살이 설치되어 있다. 또 일부는 대포 구멍인지 좁은 구멍 사이로 밖이 조금 보인다. 그리고 벽의 위쪽으로 비교적 큰 창문이 나 있다. 이 창문을 통해야 밖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성채에서 바라 본 알렉산드리아 항구
ⓒ 이상기

 
창밖으로 우리가 들어온 남쪽 정원과 정문이 보인다. 그 너머로는 만(灣)을 형성한 알렉산드리아 항구가 보이고, 항구에는 배들이 그득하다. 나는 사방으로 돌아가며 경치를 살펴본다. 동쪽과 서쪽에는 좁은 사주 위로 길이 나 있다. 우리는 서쪽으로 난 길을 통해 성으로 온 것이다. 북쪽으로는 푸르른 지중해가 보인다. 그런데 바다에 배를 거의 볼 수 없다. 그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
 
2층의 한 가운데는 과거 성채의 모습을 작은 크기로 만들어놓았다. 지금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4층이나 5층 건물이었고, 건물 주위로 미나렛이 두 개 있었다. 그렇다면 1904년 복원하면서 성채의 일부만 복원한 것이 된다. 2층을 보고 3층으로 올라가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계단이 막혀 있다. 위층에 올라가면 멋진 8각형 천정을 볼 수 있을 텐데 아쉽다.
 
성채 옛 모습
ⓒ 이상기

 
이제 밖으로 나가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성채를 나가 보니 오른쪽으로 경사로를 통해 다시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성채 밖으로 2층의 방어벽이 있는 것이다. 이곳은 지붕이 없고 낮은 벽만 있어 성채가 있는 동쪽을 제외하곤 사방으로의 조망이 탁 트였다. 날씨마저 좋아 파란 바다가 더욱 파랗게 보인다. 바다에는 낚시하는 사람과 유람하는 배가 한 둘 보인다. 이쪽은 아마 그런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한 모양이다.
 
이곳 카이트 베이 요새는 다른 관광지에 비해 이집트 사람들이 많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엄마, 연인, 젊은이들, 가족들이 많은 편이다. 또 우리가 이곳을 찾은 날이 금요일 오후여서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우리는 이들과 어울려 성을 빠져 나온다. 오후의 햇살이 성벽을 더욱 근사하게 비추고 있다. 다음으로 찾아갈 목적지는 국립 알렉산드리아 박물관이다. 박물관 역시 우리가 점심을 먹은 아티네오스 레스토랑 근방에 있다. 
 
알렉산드리아 박물관에서 사진 때문에 해프닝이 있었다.
 
박물관 정원의 파라오 석상
ⓒ 이상기

 
박물관 앞에 이르니 사진기를 가지고 들어가느니 마느니 해서 설왕설래한다. 그래도 제재를 하지 않으면 사진을 찍어보려는 생각에 사진기를 들고 간다. 표를 끊어 박물관 정원으로 들어가니 야외에 유물이 여러 점 전시되어 있다. 사진기 가지고 오길 잘했다. 파라오 흉상도 있고, 스핑크스도 있고, 부부의 좌상도 있다. 비교적 보관상태가 좋은 편이다. 박물관 안에는 우리 밖에 없다. 그래서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유물을 살펴볼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박물관은 2003년 12월 31일 문을 열었으니, 역사가 10년 밖에는 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1,800점의 유물은 다른 박물관에서 온 것들이 대부분이다. 유물은 크게 고대 이집트, 헬레니즘과 로마, 콥틱교, 무슬림의 세계로 분류할 수 있다. 박물관은 3층으로 되어 있다. 그렇지만 전시공간은 1층과 2층 그리고 지하에 있다. 1층에 그리스 로마시대 유물이 있고, 2층에 콥틱교, 기독교, 이슬람교 관련 유물이 있으며, 지하에 미라와 석상 등 파라오시대 유물이 있다.
 
하드리아누스상
ⓒ 이상기

 
우리는 먼저 1층으로 들어간다. 하늘색(sky-blue)을 배경으로 그리스 양식의 조각상이 앉아 있다. 곱슬머리에 북실북실한 수염이 영락없는 그리스인이다. 그 옆에는 로마시대 모자이크화가 보인다. 이어 그리스 로마 시대 대리석상들이 전시된 공간이 나온다. 그곳에는 그리스 시대 영웅과 정숙한 여인상이 보인다. 그리고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와 카라칼라도 보인다. 이번 여행에서는 하드리아누스 동상을 자주 보게 된다.
 
그리고 다른 공간에는 그리스 로마시대 생활용품이 전시되어 있다. 등잔, 자기, 제기 등이 보이고, 유리 용기도 보인다. 그리고 암포라라 불리는 그리스시대 항아리도 보인다. 또 다른 공간에는 알렉산드리아 인근 해역에서 발굴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다른 박물관처럼 전시유물이 많지도 않고 유명한 유물도 없지만, 그리스 로마시대를 파악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된다.
 
아케나톤 두상
ⓒ 이상기

 
우리는 2층의 종교관을 비교적 빨리 지나간다. 사실 이집트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콥틱교는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가 중심이다. 그래선지 이곳 콥틱교 유물에서 뭔가 다른 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예수와 마리아의 이콘화가 눈에 띄고, 최후의 만찬 장면도 인상적이다. 이곳에서도 십자가의 사방 끝에 작은 십자가를 붙인 콥틱 십자가를 볼 수 있다.
 
2층을 보고 우리는 지하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고대 이집트 문명의 유물을 보기 위해서다. 먼저 파라오 석상들이 보인다. 기자의 세 번째 피라미드의 주인공 멘카우라 왕의 좌상, 아케나톤(Akhenaton) 왕의 두상이 인상적이다. 아케나톤은 다신교를 배척하고 유일신 아톤을 신봉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아멘호텝에서 아크 엔 아톤으로 바꿨다. 아케나톤은 '아톤의 살아있는 정령(Living spirit of Aton)'이라는 뜻이다.
 
그는 17년 동안 통치하면서 종교와 정치 양면에서 개혁을 추구했다. 그래서 수도도 아마르나(Amarna)로 옮기고 대대적인 역사를 추진했다. 그러나 그것이 보수적인 귀족과의 대립을 불렀고, 그의 사후 왕권이 어린 투탕카문(Tutankhamun)에게 넘어가면서 이집트는 다시 다신교 국가가 되었다. 투탕카문 왕은 1922년 하워드 카터에 의해 그의 묘가 발굴되면서 유명해졌다. 투탕카문의 묘에서 발굴된 유물은 모두 카이로에 있는 이집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집트 고대 미라
ⓒ 이상기

 
이곳 지하에서는 신전에 있는 동물 조각상도 볼 수 있다. 하토르, 아누비스, 독수리 같은 신상을 볼 수 있고, 무덤의 벽에 그려진 벽화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유리함 안에 보관된 미라도 볼 수 있다. 몸을 천으로 싸고 줄로 가볍게 묶었으며, 그 바깥을 나무 상자로 감쌌다. 나무상자에는 아름다운 문양으로 채색을 했다. 미라를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곳 박물관에서 작은 해프닝을 하나 겪게 되었다.
 
그리스 로마시대의 조각, 아케나톤 두상, 지하에 전시된 미라 등을 사진 찍다가 박물관 직원의 제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는 정중하게 사진을 지워달라고 부탁한다. 안타깝지만 나는 그 귀한 사진 몇 장을 지울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십여 장 정도 사진을 남길 수 있었던 것만도 다행이었다. 사진에 대해 그 정도로 타협을 했지만 그는 우리에게 계고장을 하나 발행한다. 박물관에서의 사진 찍기, 이것은 글 쓰는 내가 안 할 수 없는 영원한 숙제 중 하나다.
 
 

<조선일보>오슬로대 "인도양 밑에, 사라진 고대 대륙 있다"
<동아일보>‘장수가야’… 대가야의 교두보였나 독립된 국가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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