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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옥 인 학 당(玉仁學堂) 작성자 정수일
파일 조회수 875
옥 인 학 당(玉仁學堂)
 

 

옥 인 학 당(玉仁學堂)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

 

김정남 이사장님께서 '고려문명대학'이란 웅지의 운을 뗐으니, 이에 무언가 연(聯)을 맞춰 화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즉흥적이나마 '옥인학당'이 그 화답으로 떠올랐습니다. 기실 어느 한 기회에 '옥인학당'이란 구상을 슬쩍 흘린 바 있지만, 워낙 화답이 아닌데다 구색도 갖춰지지 않은 발설이라서 별 반향이 없었나 봅니다. 이제 때가 맞았으니 한번 펼쳐볼까 합니다.

우리 연구소가 자리한 옥인동이 지금은 한낮 올망졸망한 저자거리에 불과하지만 사대문 안 1,400채 한옥 가운데서 300여채가 웅집한 유서 깊은 고장입니다. 우선, '옥인'이란 말부터가 상서롭습니다. 원래 이곳은 인왕동과 옥동의 두 동으로 나뉘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하나의 동, '옥인동'으로 합친 것입니다.

중국 후한 때 허신(許愼)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보면, 옥은 아름다운 돌로서 다섯 가지 덕을 지니고 있다(石之美者 有五德)고 합니다. 옥의 특징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인데, 광택이 있고 밝으면서도 온화함은 인(仁), 속의 빛깔과 결을 그대로 내비치는 투명은 진(眞), 두드렸을 때 생기는 음의 순수함과 낭랑함은 지(智), 깨지더라도 굽지는 않는 것은 의(義), 각은 예리하지만 어떠한 것도 상하게 하지 않음은 공정(公正)함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인'은 옥의 첫째가는 덕목이니 '옥'과 '인'의 결합인 '옥인'은 그야말로 절묘한 찰떡궁합이다.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에 자리한 옥인동은 조선 시대에 주로 중인들이 모여 살던 '서촌'(西村)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중인이란 양반과 양인 중간에 있는 신분층으로서 좁은 의미에서는 역관. 의관. 율관(律官). 산관(算官). 화원(畵員) 등 중앙의 여러 기술관청에 기용된 기술관원들을 일컬읍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문지식과 기술로 국가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반사대부로부터 사역인(使役人, 심부름꾼) 쯤으로 천시되어 신분적 차별대우가 강요된 사람들입니다. 시대정신에 민감한 그들이기에 이러한 서러운 처지를 개선하려는 지향을 갖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도가 철폐되면서 그들의 이러한 지향은 드디어 표면화됩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옥인동 14번지에 자리한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나 인왕산 자락의 청풍계(淸風溪, 겸재의 <청풍계도>가 유명)에서 매해 봄에 열리는 시회(詩會) 같은 문인들의 문화공동체 모임이나 활동입니다. 이와 관련해 그들이 남김 족적이 곳곳에서 눈에 띕니다. 추사 김정희가 <송석원>에, 백사 이항복이 필운대에 남긴 필흔이 오롯이 남아 있으며, 이중섭과 이상, 윤동주 같은 쟁쟁한 문인들이 살던 옛집터가 향수를 자아냅니다. 옥인동과 더불어 중인들은 선진학문과 기술을 받아들임으로써 조선의 근대화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페르시아의 시금치를 정원에서 가꾸는 등 교류에서도 선구자들이었습니다. 여기가 근대 우리 문학사의 빛나는 한 장을 장식한 여항문학(閭巷文學, 일명 委巷文學, 中人文學, 胥吏文學)의 산실이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들 아시는 사실을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이곳 특유의 지기(地氣)에서 오늘의 우리를 생각해 봄직 해서입니다. 저는 우리네 연구소를 '옥인학당'이라고 감히 따로 불러봅니다. 아니, 차라리 그렇게 명명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옥인'과 더불어 학당이 갖는 매력과 상징성이 그토록 그윽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학문을 연마하는 전당으로서의 학당은 유교의 진흥을 위해 고려 원종 2녀(1261)에 동. 서학당으로 출범합니다. 이어 개성의 5부에 각각 하나씩을 두어 모두 5부학당으로 늘어납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이 제도를 답습해 서울의 동. 서. 중. 남. 북부에 각각 하나씩 5부학당을 세우려 했으나 종시 북부학당은 세우지 못하고 4부학당만 운영합니다. 입학자역은 양반이나 서인 모두에게 주어졌으며, 입학하면 소학(小學)부터 암송케 하고 닷새마다 시험을 보는 엄격한 교육제도를 실행합니다. 대한제국 시대에는 관학이 부진하자 외래인들이 근대적 교육제도를 본떠 사학을 세웠는데, 그 이름을 '학당'이라 불렀습니다. 잘 알려진 배제학당이나 이화학당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전대에 못 세운 ‘북부학당'은 늘 응어리로 남아있어 왔습니다. 이제 그 응어리를 풀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봅니다. 주제 넘는 얘기지만 우리네 ’옥인학당‘으로 말입니다.

사명감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생각에서 ‘학당’이라 이름하니 무슨 당훈(堂訓, 시젯말로 건학이념) 같은 것이 있어야 할 터, 이렇게 졸음(拙吟) 몇 자 적어봅니다.

옥계청류지기성

(玉溪淸流地氣盛, 옥 같은 계곡에 맑은 물 흐르니 땅 정기 성하네)

극세척도전도양

(克世拓道前途洋, 어려움 이겨내고 길 트니 앞길이 끝없이 넓네)

인화홍익교류창

(人和弘益交流暢, 마음 합쳐 널리 이롭게 하니 교류가 거침 없네)

나름대로 풀어보면, 유서 깊은 이곳의 정기를 받아 머금고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하면서 새 학문을 일궈가고 이웃과 화합하며 홍익이념을 편다면 '교류합시다, 우리'라는 연구소의 대망은 실현될 것이라는 바람이자 믿음입니다.

그 과정은 곧 이사장님의 웅지 실현에 벽돌 한 장씩을 쌓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그 출발선에서 문명교류연구소나 실크로드박물관 같은 것을 품은 ‘고려문명대학’으로의 비상을 꿈꿔 봅니다. 더불어 함께 꾸는 꿈은 이루어진다는 신념 속에 눈을 뜨고 이런 꿈을 꿔 봅니다. 이쯤되면 ‘대학’에 대한 ‘학당’의 대련으로 어지간히 화답한 셈이 되겠지요.

옥인동은 명당입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은 이상(異常)이지만, 명당에서 용이 나는 것은 범상(凡常)입니다. 다 함께 교류하고 합심협력해서 우리의 뜻을 이루어 나갑시다.

 

2009년 7월 20일, 정수일 삼가

고려문명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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