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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삼국유사(三國遺事)』속의 선덕여왕 이야기 작성자 차광호
파일 조회수 1052
『삼국유사(三國遺事)』속의 선덕여왕 이야기
 

 

『삼국유사(三國遺事)』속의 선덕여왕 이야기

차광호 (단국대학교 사학과 강사)

 

지인(知人)들과 술자리를 할 때, 역사학을 전공한 필자에게 질문이 쇄도하는 경우가 있다. 바로 텔레비전의 역사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며 방영되는 시기이다. 그럴 때면 “내가 배운 역사도 쓸모가 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약간의 우쭐함마저 더해져 술자리의 흥취를 더하게 된다.

최근에도 필자는 이러한 질문세례를 종종 받곤 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선덕여왕의 삶을 주제로 한 모 지상파 방송국의 역사드라마 덕분일 것이다. “진짜 미실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대단했어?”, “덕만이가 해외에까지 나가면서 고생한 것이 사실이냐?”라는 질문들에 대해 필자가 해 줄 수 있는 답변은 솔직히 말해 “글쎄!”라는 대답뿐이다. 방송작가들의 상상력에 기초해 탄생하는 드라마의 내용은 실제 역사와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사실이 아니야!”라고 모질게 단정하는 것 역시 주저하게 된다. 비록 역사드라마를 통해서지만 역사에 재미를 느끼며 흥미를 갖는 이 관심들을 꺽어 버리는 것 역시 싫기 때문이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에 대한 역사 기록은 방송 드라마를 전개해 나갈 만큼 많지 않다. 단지 김부식의『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약간이 업급 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삼국사기』신라 본기(本紀)에 전해지고 있는 기록은 정사(正史)체의 딱딱한 어휘로 공식적 내용만을 기록하였기에 드라마에서와 같은 재미를 찾기가 어렵다. 그것은 오히려 선덕여왕 통치 시기의 국가 기록에 주안점을 둔 것이기에 덕만이라는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기가 힘들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삼국유사』에 탑재된 선덕에 대한 기록은 오늘날의 텔레비전 드라마와 정서적으로 유사한 성격을 갖는다.

『삼국유사』의 선덕여왕에 대한 기록은 기이(紀異) 편의「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조에 나타난다.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란 ‘선덕왕이 미리 예견한 세 가지 일들’이라는 의미를 갖는데, 이것은 일종의 예지력이다. 선덕여왕은 생전에 세 가지 큰일을 예견한다. 첫째는 당 태종이 꽃그림과 향기 없는 씨를 보내왔을 때, 그 향기 없음을 미리 맞춘 일이고, 둘째는 겨울철 영묘사 옥문지에서 개구리들이 우는 소리만 듣고도 백제군이 쳐들어온 사실을 알아 맞춘 일이며, 셋째는 자신이 모년 모월에 죽을 것이라는 것을 예지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든다. 당시에는 미래 사정을 예견하는 일관(日官)이라는 직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것을 왕의 능력으로서 강조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선덕여왕의 예지력이 어떠한 밑그림 속에서 발휘되고 있는가 하는 점과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의 예지는 ‘향기 없는 꽃’에 관한 것이지만, 그 배경이 되는 것은 당과 신라의 외교관계이다. 또한 두 번째 예지는 백제와의 전쟁이라는 상황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으로 고립되어 있었던 신라에 있어 당과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신라를 상대하는 당의 입장은 그렇게 협조적이지만은 않았던 것 같았다. 당의 황제는 도움을 요청하러 온 신라의 사신들에게 공공연히 선덕의 자질, 특히 여왕이 갖는 문제점들에 대해 비아냥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를 왕으로 삼았기 때문에 주변국들이 깔보고 자주 침범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당시 신라를 대하는 당의 기본입장이었다. 물론 이것은 여러 가지 정치적 노림수를 포함시킨 고도의 외교 전략이었다.

그런데 당나라의 이러한 입장이 신라에 전해지면서 선덕은 보다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여왕의 존재에 대한 우려감은 선덕의 즉위 당시부터 존재해왔었다. 그런데 이것이 당나라의 외교적 입김과 어우러지면서,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식으로 오도되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당시 삼국의 정황을 고려하면, 이러한 비난은 보다 큰 명분을 갖는 것이었으며, 보다 많은 동조자들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즉 한 해 동안에도 수 십 차례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당시 상황에서 국왕의 존재는 전쟁 영웅으로 묘사될 필요성이 있었다. 화려한 갑옷과 무기로 무장하고 전쟁터를 돌며 군대를 지휘하는 존재여야만 했다. 그러나 여왕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치마를 입는 여왕에게서 그러한 모습을 상상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처럼 선덕여왕의 통치시기에 있어 그가 갖는 가장 큰 고민은 ‘여왕의 존재’라는 비난과 도전을 어떻게 극복하고, 당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즉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예지력’이라는 무기를 갖고 자신의 정적들과 맞서기 시작하였다. 당 태종의 비아냥이 담긴 예물에 대해서는 그 성격을 미리 간파하였고, 백제의 침공을 예측·격파함으로써 말을 타고 직접 전쟁에 출정하지 않고도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다는 점을 신하들에게 인식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이런 노력은 과연 성공했을까? 그러나 아쉽게도 『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는 그 성공담에 대한 언급이 생략되어 있다. 단지『삼국유사』「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조에 그 가능성을 추측할 수 있는 짤막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선덕은 아무 병이 없던 시기에 신하들을 불러서 자신이 죽을 날을 예언하고 결국 그 예언을 지키게 된다. 그런데 선덕이 사망하는 시기는 상대등 비담 등 진골귀족들이 일으킨 반란이 진압된 지 얼마 안 되는 혼란한 시기였다. 여기서 당시 비담의 반란을 진압하며 군권을 장악한 김유신이 당과의 외교권을 갖고 있었던 김춘추 세력과 손을 잡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선덕 이후 진덕여왕의 치세는 결국 김춘추의 무열왕계로 대권을 이양하기위한 과도기였다는 점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이 여왕의 죽음에는 많은 의문이 내포되어 있다. 결국 정치적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 까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타살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이처럼 『삼국유사』속의 선덕여왕에 대한 이야기는 읽는 독자로 하여금 많은 추측과 상상력을 가능케 해 준다. 비록 역사와 역사드라마 사이의 간극은 존재하지만, 『삼국유사』를 통해 읽는 선덕에 대한 이야기와 텔레비전 역사드라마를 통해 보는 그 감흥이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이 아마도 이러한 연유에서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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